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오다이 황제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파일:external/a3.att.hudong.com/01300001128119143261897552164.png]] 1913년 10월 22일 [[베트남]] [[후에]]의 황성인 [[후에 황궁]]에서 태어났다. 그러나 [[프랑스]] 지배 체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. 프랑스 유학 및 프랑스 감시 체제에서 살아가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술과 여자에만 탐닉해 살아가게 된다. 이런 가운데 [[제2차 세계대전]] 당시 [[일본군]]이 베트남에 쳐들어올 당시에도 [[일본]]의 허수아비 황제로 그 지위를 유지했는데, 그야말로 [[부의]]와 똑같은 신세였다. 하지만 그래도 아예 개념은 없지 않았고, [[베트남]]에서 착취하는 [[일본]]에 대하여 "짐은 외국군이 짐의 백성을 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소."라며 막으려고 나서긴 했다. 물론 일본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베트남에서 착취하여 수백 만 베트남 민중을 굶어죽게 하였다. 결국 이 모든 것이 일본에게 빌어붙은 그가 벌인 짓이라고 믿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증오를 받게 된다. 그래도 [[호찌민]]은 그를 일절 죄인으로 대우하지 않고 황제로서 정중하게 우대하며 제위에서 흔쾌히 퇴위하길 권유했고, 그도 순순히 받아들여 베트민(越盟) 최고 고문 자리에 앉았으나 [[호찌민|실권자]]는 따로 있었으니, 여기서도 허수아비였다. [[파일:external/fs.chungta.com/Vua-Bao-Dai-1913-1997.jpg]] 나중에 [[베트남국]] 체제의 초대 국장(國長, [[국가원수]])이 되었지만 여전히 [[프랑스]]의 [[허수아비]]였기에 자포자기한 그는 '''짐의 시대가 이렇게 왔다'''며 절규 아닌 절규를 하며 술과 탐욕에 찌들어갔다. [[디엔비엔푸 전투]]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더 이상 프랑스의 힘을 빌려서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바오다이는 [[1954년]] 저명한 [[민족주의]] [[독립운동가]] [[응오딘지엠]]을 총리에 임명해서 상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프랑스와 프랑스의 꼭두각시인 바오다이를 아주 싫어했던 응오딘지엠은 프랑스 퇴거 운동과 더불어 군부의 친불파들을 대량으로 숙청했고 [[1955년]] 민중투표를 실시해 바오다이의 퇴위 여부를 물었다. [[여론]]은 압도적으로 바오다이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고[* 하지만 투표는 부정투표였다.] 바오다이 황제는 마침내 끌려나오게 된다. 하지만 당시 바오다이는 오히려 "이제서야 지겨운 허수아비 생활을 마감하는군. 30년이나 걸렸어."라며 홀가분하게 퇴위 서명을 하고 베트남을 떠났다. 이후 [[프랑스]]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그는 그동안 2명의 황후와 3명의 후궁을 두었다. 그는 본래 [[불교]] 신자였으나, 죽기 얼마 전인 80세에 [[가톨릭]]으로 개종했다. [[1997년]], 83세에 [[파리(프랑스)|파리]]에서 숨질 때는 6번째 결혼한 [[프랑스인]] 아내 모니크 뱅 튀가 곁에서 자리를 지킨 가운데 눈을 감았다. 그래도 [[애국심]]은 남아 있어서 [[베트남 전쟁]] 때도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정부와 미국에게 전쟁을 멈추라고 말하는 등 나름 비참한 상황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이거저거 시도해 본 건 사실이라는 점에서 망국의 황족 중에는 그래도 괜찮은 [[인물]]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